덫
20150927
제목 / 덫
본문 / 야고보서 1장 12~18절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신앙생활에서의 시험이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시험이 우리 인생에 닥치게 됩니다. 결국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시험을 잘 치른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잘 통과하면 신앙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은 다양합니다. 여러 형태의 시험이 오는데 외부적으로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환란과 시험, 핍박, 물질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등의 외부적 어려움이 옵니다. 시험을 영어단어로 Test, Trial, Temptation으로 3T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내부적인 시험, Temptation에 관한 것입니다. 시험과 유혹이라 구분할 수 있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시험 속에 유혹이 들어 있습니다. 가난한 것은 시험, Test입니다. 시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이 너무 혹독하면 돈으로부터 유혹, Temptation이 옵니다. 그런데 이런 유혹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될 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 하나가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묘한 심리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어 놓고도 그 죄로부터 자신이 빠져나가려는데 그 방법이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친구 지갑을 훔쳐서 혼을 내었더니 엄마가 용돈을 주지 않아서 그랬다며 원인 제공자를 엄마로 삼으며 자신의 죄를 엄마에게 떠넘깁니다. 아내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아 바람을 피웠다고 합니다. 결혼은 자신들이 해 놓고 하나님이 그때 결혼이 안 되게 하셨어야지 왜 이렇게 고생하게 하냐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은 오래된 죄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준 여자가 나로 먹게 했다며 탓을 여자에게도 돌리고 하나님에게도 돌립니다. 책임 전가와 함께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를 시킵니다.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었다.”, “누구라도 내 입장이 되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는 합리화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죄로 인해 찾아오는 죄책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죄책감의 문제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죄책감이 찾아오면 수치가 찾아옵니다. 내 수치를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니 옷을 입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나뭇잎으로 가린 것도 죄책감에서 오는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자기를 방어하고 죄책감으로부터 스스로 도피하려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있기 때문에 남을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합리화합니다.

야고보는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는 태도를 지적합니다. 죄를 짓게 되는 출처에 대해 말씀합니다. 왜 지를 짓고, 무엇이 시험에 들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까요?

야고보의 결론적 이야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절에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에 빠지도록 유도하거나 조장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본문 17~18절에서 야고보는 「17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라고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모든 선한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어떤 그림자도 없으시고 언제나 선하신 분이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기보다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시고 이기도록 도우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험은 어디로부터 올까요? 시험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욕심에 끌려가다 보니 미혹된 것입니다. 시험의 출처는 바로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마귀가 유혹하기도 하고 남들이 어떻게 하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 내 안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내 욕심 때문에 끌려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사탄도 우리 마음 안에서 욕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욕심에 미끼를 던집니다. 미혹이라는 단어는 낚시 용어입니다. 미끼를 던져 놓으면 물고기가 미끼를 먹다가 낚시바늘에 걸리는 것처럼 우리의 욕심에 끌려 나도 모르게 그것이 나를 죽이는지 모르고 덥석 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유혹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 안의 욕심을 마귀가 부추겨서 시험에 빠지게 하는데 이 욕심 때문에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낚시를 할 때 고기가 걸려들도록 미끼를 던져 놓으면 반드시 무는 고기가 있습니다. 고기가 걸려들도록 다양한 형태의 미끼를 만들어 놓습니다. 강이든 바다든 호수든 어떤 곳이든 미끼에 걸려드는 고기는 많습니다. 미끼를 먹으려는 고기들로 가득 찼습니다. 흔들리는 미끼는 고기들에게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미끼를 물면 유능한 낚시꾼은 순식간에 잡아 올립니다. 고기가 잡혀 올 때 고기의 입장에서는 비참합니다. 조그만 낚시 바늘에 큰 고기가 걸려 꼼짝을 못합니다. 낚시에 걸려 오는 고기들은 죽음으로 우리 밥상에 올라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는 낚시 이야기에서 사람들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낚시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비슷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미끼를 달아놓은 덫에 걸려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지도 모르고 미끼를 덥석 잡습니다. 저것만 취하면 내 인생이 행복할 것 같은 것입니다. 미끼만 물면 내 인생이 풀릴 것 같습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미끼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무리 크고 멋진 고기라도 미끼에 잡히면 끝장나는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평소에 준수하고 얌전하며 모범적 가장이며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인데 덫에 걸려듭니다. 덫에 걸리는 그 순간 덩치가 크거나 머리가 좋다고 하는 사람도 죄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마귀가 던진 미끼에 걸려들어 지금까지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떤 미끼, 덫이 있습니까? 오래된 시험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보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게 시험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탐욕을 부추기고 허영심을 만족시켜 줄 것처럼 야단입니다. 매력적이며 금지된 욕망으로 사방에 덫을 놓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선을 그어놓은 곳에 접근하다가 넘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안의 욕망이 문제입니다. 유혹이 오는 순간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얼마나 파괴할 것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물고기가 자기 새끼들에게 저런 미끼는 절대로 물지 말라고 가르쳐 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미끼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순간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신기한 것은 금지한 장소에서 사고가 납니다. 누군가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 다윗, 삼손… 그들은 경계선을 넘은 사람들입니다. 욕망에 빠져드는 순간 미끼에 집착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립니다. 일종의 환상 혹은 환각 증세에 빠집니다. 시험에 들어 죄를 짓는 동안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사탄으로부터 왔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에 있는 욕심이 그것에 끌려들어 죄를 짓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죄를 지으면 누가 짓는 것입니까? 마귀가 유혹을 한 것은 맞지만 죄를 짓는 것은 우리 각자 자신입니다. 남 탓 할 수 없습니다. 죄는 내가 짓습니다. 내가 허락한 것이고 내가 원했던 것을 내가 취했던 것입니다. 내가 No했으면 되었던 것인데 내가 No 하지 않고 Yes 하고 받아들인 것이 곧 죄가 된 것입니다. 친구가 유혹을 해서 죄를 지었다고 해서 친구 때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은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결국 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넘어진 것이고 내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일어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이 져야 합니다.
유혹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죄의 속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란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되면 죄를 낳는데 죄는 낳는 순간부터 자랍니다. 사망에 이르기까지 자랍니다. 잉태, 장성, 자란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는 자라납니다. 어린아이는 죄 중에 잉태됩니다. 시편 51편의 다윗도 “내가 죄악 중에 잉태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습니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죄도 자랍니다. 죄의 활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욕심을 그대로 두면 계속 움직이고 자라나며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죄는 아주 빨리 자랍니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보다 죄가 자라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죄가 잉태되면 결국 사망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죄가 계속 자라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야 합니다. 죄가 성장하도록 방치하면 나중에는 내 힘으로 다룰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다윗은 왕궁 옥상에서 한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것으로 인해 수없는 역사의 변수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한순간 고개를 돌리지 않은 것이 그렇게 크게 일이 벌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죄의 초기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일은 없습니다. 어떤 죄든지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그 죄는 그대로 있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자라가기 때문에 초기 대응이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옥상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시선을 옮겼으면 되었는데 그 시선을 옮기지 못한 화근이 엄청난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유혹의 단계에서 시간을 끌고 소극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백발백중 망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잠깐 동안이고 곧 끝내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타이밍을 놓치면 죄는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끝내고 싶지만 끝낼 수가 없게 됩니다. 결국 죄를 상대해서 싸울 마음조차 없어지고 죄를 즐겨버리게 됩니다. 끝까지 가는데 말씀에서는 사망에 이르기까지 가게 된다고 합니다.
죄는 적당한 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끝을 보고야 맙니다. 욕심의 끝은 비참합니다. 욕심이 잉태되니 죄를 낳아버립니다. 죄가 가만히 있지 않고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낳습니다. 작은 출발이지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는 작은 출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깊이 빠져들어 나중에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결국은 왕가가 무너지는 결정적 요인이 되면 비극적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원인 제공을 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섰지만 그가 뿌려놓은 죄의 결과는 심각하게 돌아왔습니다. 안목의 정욕이 자라 나중에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보는 것은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내면에서 자라가게 되고 결국은 소유하려는 욕망에 시달리게 됩니다. “보는 것쯤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는 것을 통한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는 것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 “보임직도 하고”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지를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밀고 들어오는 유혹은 강력합니다. 보는 것을 단순히 보는 것으로만 여기면 안 됩니다. 보는 행위 속에 우리 안의 욕망과 뒤섞이게 되면 그것은 증폭현상이 일으킵니다. 욕심이 잉태되고 나면 점점 자라고 마침내 어떤 결과가 탄생되고 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종국적으로 육체적 사망이지만 그 이전에 인격적 사망, 때로는 가정적 사망, 사회적 사망을 선고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특성입니다. 작은 출발이지만 크게 작용합니다. 작은 출발에서부터 경계심을 가지지 않으면 꼼짝없이 당하게 됩니다. 작게 시작한 죄가 한 가정을 파괴하기도 하고 공동체를 비극으로 몰아가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욕망은 그대로 두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똑같습니다. 죄는 영적인 죽음과 영원한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사람들마다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알고 덫을 놓습니다. 다윗은 광야의 험난한 삶에서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는 용사였습니다. 그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의 영웅 골리앗을 넘어뜨렸던 전설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여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삼손 역시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힘은 강점이면서 약점이었습니다. 드릴라라는 한 여인의 무릎을 베고 그의 인생이 무너졌습니다. 이삭은 먹는 것에 약했습니다. 별미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가룟 유다는 물질에 약했습니다.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 버렸습니다. 사울은 권력욕에 약했습니다. 그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칩니다. 자신의 약점을 알면 사전에 조심해야 합니다. 기름을 가지고 있다면 불을 조심해야 합니다.불이 있는 곳에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내가 기름을 가지고 있는데 불이 붙는지 확인해보겠다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의도적인 회피를 해야 합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을 책임지는 자리에 가면 그 결과는 망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성경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삼손과 같이 여자를 밝히는 사람은 그런 유혹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넘어졌던 부분이 어디인가를 계속 확인하면서 답을 얻어야 합니다.


셋째, 유혹의 통로를 차단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 첫 시작입니다. 보는 것을 통하여 마음에 미혹을 일으킵니다. 요즘은 이미지 전쟁입니다. 비쥬얼 시대입니다. 광고도 매우 심리학적으로 접근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건드립니다. 광고를 볼 때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어디에 눈이 자주 갑니까? 보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모든 욕망이 눈의 감각을 통하여 찾아옵니다. 보고 있으면 탐욕이 일어납니다. 멋진 물건을 계속 들여다보면 탐욕이 일어납니다. 이성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한 영상이나 책을 보지 마십시오. 보는 것은 뇌로 전달되고 생각에 자극을 일으킵니다. 보는 것은 생각으로 연결됩니다. 보는 것은 이미지로 남아 뇌에 입력되고 뇌에서 상상을 일으킵니다. 생각을 통제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생각 안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5~6절에서는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행동이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 육신의 생각이 사망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하면 이미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행동으로 이르는 것은 금방입니다. 생각하면 곧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붙잡아야 합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바로 보는 것을 통해 옵니다. 성경은 마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마음관리에 힘을 써야 합니다. 마음에 따라 우리 삶이 결정됩니다. 중고차 시장에서 차를 사려고 할 때 겉보다는 속에 관심을 가집니다. 겉도 봐야 하지만 겉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속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겉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점령당하면 끝입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유혹에 관한 원론적인 방법은 피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결국 도망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혹을 주는 자리를 피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분은 먹는 자리를 가급적 피해야 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과 관련된 업무를 한다면 결과는 뻔합니다. 참는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유혹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라고 합니다. 유혹의 요소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마귀는 유혹의 틈을 노립니다. 틈이 있으면 여지없이 파고 듭니다.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신앙과 인격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을 때 자신의 몸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격과 삶이 준비된 사람입니다. 다윗이 한가하게 왕궁에서 거닐고 있을 때 마귀가 치고 들어왔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찾아올 때 소극적으로 있으면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선용해야 합니다. 돈과 시간의 여유가 주어질 때 조심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습니다. 어떤 한 가지가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상태로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이 경계하고 조심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돈과 시간이 다 주어지면 사단이 유혹을 걸어옵니다. 죄를 지을 기회가 높아집니다. 돈도 있고 시간이 많아지면 즐길 것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즐기고 은혜생활을 소홀히 하다 보면 마귀가 깔아 놓은 덫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런 사람을 위해 마귀는 수없는 곳에 덫을 만들어 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립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소극적입니다. 적극적으로 주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요즘은 주변의 유혹들은 넘쳐나고 욕망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위험한 덫이 너무 많습니다. 물질적 유혹이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이성적 유혹이 흔하고 강력해졌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시험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적극적으로 영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가 승리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바쁜 교회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거의 매일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때는 교인들을 너무 자주 교회로 불러내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을 불편해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런 자녀들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 많은, 덫이 많은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선택입니다. 우리 안에는 욕심이 있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 미끼를 던져 놓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덥석 물면 인생은 한방에 날아 갑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를 벗어나 돌아다니며 세상의 것들을 다 누려보았습니다. 그러나 빈털터리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별것 아닌 것 같고 지루하며 세상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 누려보니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직장과 교회, 그리고 집을 오가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뻔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결국 이 삶이 최고임을 믿습니다. 특별한 것이 세상에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의 수많은 곳에는 마귀가 만들어 놓은 수없는 덫이 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은혜의 경계를 벗어나면 무방비입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선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매우 축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선, 나를 보호해 줄 은혜의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친구를 사귀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믿음의 교우들과 교제를 하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가 되어 미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유혹을 받을 가능성들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시선을 그리스도에게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죄와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승리하게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파워를 이기는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삶에서 찾아오는 수없는 시험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와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죄의 힘을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가 믿고 주님을 붙잡고 나아가면 우리를 찾아오는 수없는 덫들, 수없는 유혹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유혹으로부터 이기게 하시는 그 능력을 날마다 경험하며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